크레시 전투 1.33

Crécy-en-Ponthieu,
France

About 크레시 전투

크레시 전투 크레시 전투 is a well known place listed as Landmark in Crécy-en-Ponthie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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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시 전투는 1346년 8월 26일 북부 프랑스 항구도시 칼레 남쪽에 위치한 크레시앙퐁티외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백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새로운 무기와 전술의 혼합을 통하여 기사도의 시대를 끝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요약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대략 12,000명밖에 없었고,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대략 30,000~40,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심각한 수적 열세에 처해있는 잉글랜드군이 엄청난 대승을 거둔 이유는, 더 뛰어난 무장과 전술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현대 화력 개념의 중세적 도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장궁병의 집단 사격은 프랑스 기사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이 사실은 당시까지 통용되던 "궁병은 무장한 기사에게 별반 피해를 입힐 수 없다"라는 통념을 완전히 깨뜨렸다.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용맹한 기사들은 장궁병에게 돌격하다가 진흙탕에 빠져 탈진해 있었다. 그 결과로 보드킨 화살에 완전히 꿰뚫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 귀족의 3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전투 후반에, 장궁병들도 기사의 갑옷을 꿰뚫기 힘들게 되자, 그들은 기사들의 측면으로 돌아가 말을 화살로 공격해 죽였다. 그래서 기사들은 진흙탕 한가운데에서 무거운 철갑을 입고 두 발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많은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기사도 시대의 종말"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전투 도중에 많은 부상자와 포로들이 "즉결 처형" 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사도 정신에 완벽하게 위배되는 일이다. 그리고 말 위에 탄 기사는 더 이상 보병들에게 "무적"이 아니게 되었다.배경1337년 전쟁이 시작되었고, 1340년 6월 23일에 일어난 슬로이스 해전에서 승리한 잉글랜드였지만, 지상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해, 그이상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2년간 휴전에 들어갔다. 그 사이 브르타뉴 계승전쟁이 시작되면서 양쪽의 대리전쟁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자, 1340년에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지방을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려고 했지만, 재정적 문제와 불확실한 동맹관계 때문에 침공을 포기했다. 5년후 에드워드 3세는 전쟁을 재개하여 아키텐에 더비 백작 헨리가 이끄는 군대를 보냈다. 다음해 에드워드 3세는 직접 군을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캉 등을 공략한 후 7월 26일 카엔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군은 8월 24일 블랑셰타크 전투에서 다시 승리하였다. 이윽고 파리까지 침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