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 학살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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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 중인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이다. 347명에서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더욱이 몇몇 희생자는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 이 사건에는 미군 26명이 가담하였으나 입대한 지 4개월 2주밖에 되지 않은 윌리엄 켈리 중위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경과배경미국 육군 23 보병 사단, 11 여단, 20 보병 연대, 1 대대, 찰리 중대는 1967년 12월 남베트남에 투입되었다. 투입 첫달은 별다른 교전이 없는 상황이었다. 3월 중순이 되자 중대원 5명이 부비 트랩에 의해 사망하였다.1968년 구정 대공세 기간 동안 꽝응아이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48대대가 미군을 공격했다. 그 결과 미라이를 비롯한 여러 촌락이 흩어져 있는 꽝응아이의 손미 지역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미군은 이 촌락들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결정했다. 오란 K 헨더슨 대령은 "거기 가서 확 쓸어버려"라고 지시하였다. 프랭크 A 베이커 중령은 1대대에게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농경지를 불사르고 우물을 폐쇄하라고 명령하였다.작전 전날 저녁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는 손미에서 시장이 철시되는 오전 7시까지 남베트남 해방전선 이거나 동조자로 의심되는 모든 민간 저항군을 몰아낼 것이라고 작전 개요를 중대원들에게 설명했다. 후일 메디나는 이 작전 계획이 여성이나 아동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진술하였으나 작전에 참여했던 소대장과 병사들은 자신들이 여성이나 아동, 가축을 가리지 않고 손미 지역의 모든 것을 게릴라 용의자로 간주하라고 지시받았다고 진술하였다.다른 두 중대가 미라이 지역을 포위하는 동안 찰리 중대는 1소대를 선두로 미라이에 진입하였다.학살1968년 3월 16일 아침 찰리 중대는 공격용 헬리콥터를 통해서 소구경 대포와 함께 미라이에 진입했으나 적군을 찾을 수 없었다. 미군들은 가옥을 수색하여 사람들을 마을 한가운데로 몰아 세우고 자동화기로 학살하였다. 1소대는 70명에서 80명의 사람들을 2소대는 미라이 북쪽 미라이 4 촌락에서 60명에서 70명의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3소대는 도피하는 "적"을 추적하여 12명의 여성과 아동을 사살하였다.